“돌아왔네, 치즈.”
어리가 치즈를 반겼다. 치즈는 가벼운 웃음기를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느끼고 한층 진지한 눈빛으로 어리를 바라봤다.
“재미있는 장난이 생각났었는데… 그럴 때가 아닌가 보네.”
“막 회의를 끝내려던 참이야. 티틀의 암시장에 대해서.”
어리가 회의에서 나온 얘기를 치즈에게 해주었다. 치즈는 어리의 말을 듣고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었다.
“말썽이네. 저번보다 더 대담해진 거 같아.”
“심상치 않아요. 아무래도 자영을 쫓으려고 움직이는 것 같아요.”
씰이 답하자, 치즈는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골로버를 만났었어. 그런데 그 녀석도 자영을 잡는다고 하더라? 확실한 물증을 잡아서 손 좀 쓰고 왔지.”
“갑자기? 무슨 일인거지… 티틀과 동맹이라도 맺은 건가?”
“아무튼… 골로버의 옅은 이들을 분산시켜놨어. 좀 도와줬지.”
어리와 치즈가 얘기를 주고받았다. 어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예전 생각이 나네… 수호자를 모을 때.”
“다시 만나고 싶어?”
“우리의 처지에선 부끄럽지.”
침울하게 말하는 그의 어깨를 치즈가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때, 씰이 무언가를 느낀듯 눈을 크게 떴다.
“어리 씨. 백지 곳곳에서 상당한 규모의 색채귀들과 영역이 움직이고 있어요.”
“방향은?”
“모두 일점산이에요. 전방과 후방, 총 두 부대가 곧 모일 것 같아요.”
어리의 물음에 씰이 답하자, 치즈와 큐 파인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점산? 갑자기 그런 곳에는 왜?”
“우와 씰!!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 옅은 이들을 세계 곳곳에 둘러놨어요. 그걸로…”
“잠깐잠깐, 한 명씩 얘기해줘. 정신 사나워…”
웅성웅성거리던 수호자들은 어리의 말을 듣고 동시에 침묵했다. 싸함이 수 초 흐르고 치즈가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딜러들도 일점산으로 모이고 있는 건가?
“아마도요. 영역을 숨겼을 테니 느낄 수는 없지만요.”
“설마, 자영이 거기 있는 건가?
“아닐 거예요. 설령 그렇다 해도 저희가 있으니까요.”
치즈가 씰의 말을 듣고 고뇌에 빠졌다. 씰이 걱정을 덜어주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치즈, 큐 파인드. 먼저 티틀을 추적하고, 일이 커지기 전에 제압해. 녀석은 지휘 때문에라도 본거지에 있을 거야.”
“어? 나는 괜찮은데… 얘가 내 말을 들을까?”
“싫어! 씰이 아니면 같이 안가!!!”
“역시…”
큐 파인드가 어리광을 부리자 씰이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파인드, 치즈와 같이 가줘요. 그동안 저는 파인드를 위해서 따듯한 장갑을 만들고 있을게요.”
씰의 말에 큐 파인드가 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큐 파인드는 과장된 자세를 취하며 치즈의 앞으로 걸어갔다.
“뭐해? 어서 가자!”
“어리, 다음 장난 기대하고 있으라고!”
“알았어… 아무쪼록 큐 파인드를 잘 부탁해. 다음 지시는 씰이 전해줄 거야.”
큐 파인드와 치즈가 걸음을 옮겼다. 영역은 검정빛에서 아주 어두운 푸른빛으로 변했다.
씰과 어리는 떠나가는 둘을 보며 중얼거렸다.
“큰 위험이 따르는 작전이지만, 최적의 결정이네요.”
“…치즈를 잘 따랐으면 좋겠네.”
“겉으론 싫어해도 많이 미워하진 않을 거예요.”
“…이제 시작일까…”
“저희가 어려운 길을 택했죠.”
“그렇지. 우리의 의지로…”
어리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잠깐의 고요함이 맴돌고, 어리가 이어 말을 끝맺었다.
“불만은 없어. 운명인 거야.”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역시 아름답게 생기셨네요”
다예람이 풍기는 색채귀의 냄새를 이제서야 느낀 메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영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색의 영역과 체취를 이 정도로 지울 수 있는 색채귀는 얼마 없다.
이어 다예람의 다자색 영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태평소가 울리는 소리와 더불어 독특한 형식의 한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밀하다. 그리고 깔끔하다. 정녕 색채귀의 영역이 맞는가? 메어가 느낀 첫인상이었다.
이에 맞서 메어와 자영의 보랏빛 영역이 모습을 보였다. 영역의 충돌 여파로 들리는 소리는 서양과 동양의 악기가 어우러진 퓨전 음악같은 느낌이었다. 밤의 색이 무색하게 고고한 빛이 내뿜어졌다. 발밑의 그림자들은 빛의 산란에 맞춰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한 녀석 더 있어.”
“뭐? 어디에?”
“높이 뛰어!”
자영과 메어가 거의 동시에 제자리 뛰기를 하자, 그림자 속에서 가시가 솟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 어두운 물웅덩이는 퀴스피드의 영역이었다.
“빗나감.”
솟았던 가시가 다시 물웅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메어와 자영 쪽의 물웅덩이가 사라졌다. 이윽고 다예람의 그림자로 의태한 영역을 통해 퀴스피드가 모습을 스르륵 드러냈다.
“기습 실패네, 퀴스피드. 하지만 나름 좋은 작전이었어.”
“어려움. 다음번엔 확실한 때를 노리겠음.”
“그래. 넌 저기 리본 묶은 애를 노려. 초짜니까 금방 이길 수 있을 거야.”
“누가 초짜래?”
다예람과 퀴스피드의 대화에 메어가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들은 퀴스피드가 메어를 노려봤다. 메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영역이 충돌하면서 눈이 좀 부시지 않았어?”
메어가 퀴스피드를 향해 두 손을 펼쳤다.
“기습은, 나도 전문이거든.”
퀴스피드의 뒤로 바유와 옅은 이들이 진을 그리고 있었다. 메어의 전형적인 함정. 그녀의 의지색이 감응하자, 퀴스피드는 온몸으로 공격을 받아냈다. 다예람은 여전히 웃으며 자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퀴스피드가 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느낌이었다.
잠시 뒤 퀴스피드가 번개와 연기를 뚫고 모습을 보였다. 살짝 그을려진 모습이었지만, 큰 유효타는 아닌 모양이었다. 메어는 그의 맷집을 보고 놀랐다.
“저 오징어 녀석… 저번의 그 초록색 거인이랑 비슷해. 유동적이야. 충격을 다른 곳으로 흘려보낸 느낌이야."
“숟가락을 든 녀석을 더 주의해. 암시장의 세 딜러 중 한 명이야.”
“골로버보다도?”
“당연히.”
“너무하잖아. 쉴 틈도 없이 저런 녀석들을 만나다니…”
압박감, 생존에 대한 필사적인 본능. 옅은 이 시절에 느낀 의지의 소멸과 존재에 대한 갈망이 다시 찾아왔다. 메어가 색채가 되고 나선 처음 겪는 심정이었다. 허나 당당함은 꺾이지 않는다. 바유와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자영이 있다.
“메어, 먼저 저 어두운 녀석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방어는 내가 도와줄게.”
“좋아!”
메어가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수신호에 따라 메어의 뒤쪽으로 날아왔다. 자영은 메어의 다리와 손에 자수정 갑옷을 둘러줬다. 다시 한 번 퀴스피드가 그림자를 통해 가시를 뻗었지만, 자수정 갑옷에 막혀 꺾였다. 자영은 흠집이 난 자수정 갑옷을 계속 보강해주었다. 빈틈을 본 다예람이 숟가락을 들고 순식간에 자영의 앞으로 걸어왔다.
“허술하신 걸요.”
“그럴 리가, 다 노림수야.”
시야가 번쩍였다. 다예람은 그 빛의 근원지를 찾았다. 바로 자신의 다리. 다리가 자수정에 단단히 뒤덮여있었다. 자영이 메어와 첫 대면을 했을 때와 같았다. 다예람은 웃으면서 옷의 품에서 작은 찻잔을 꺼내 들었다. 찻잔 안에선 방금 우린 것 같은 청아한 냄새의 뜨거운 차가 담겨 있었다. 찰나의 순간 다예람의 의지색이 발했다. 증식한 찻물이 다리와 자수정의 틈 사이로 침투하며, 순식간에 자수정을 깨트려버렸다.
“자영 씨에 비하면 정말 볼폼없는 의지색이죠?”
다예람이 웃으며 얘기를 걸어왔지만, 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예람의 전신을 응시하며 완전히 구속했다. 다예람의 말끝은 자수정 내부에서 흐리게 웅웅거렸다. 완전히 제압되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다예람은 구속당하기 전 미리 찻물로 된 막을 쳐놓았다. 찻물은 자수정의 틈새에 파고들어 팽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금이 쩌적거리며 자수정이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어때요? 이렇게 쓰는 건 나름 괜찮죠?”
“누굴 향해서 얘기하는 건데.”
“자영 씨지요! 심심해하실 것 같아서요.”
“안심심하니 그 입 좀 다물어.”
자영이 다예람의 입술을 향해 자수정 집게를 만들어 찝어버렸다. 그녀의 입술이 물만두피처럼 꾸불꾸불해졌다. 다예람은 계속 눈웃음을 지으며 집게를 뺐다.
“그런가요?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시네요.”
화가 난 모양인지 목소리에 조금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둘이 서로 탐색전을 하는 동안, 메어는 퀴스피드를 포착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퀴스피드에 대해 보고 추측한 사실은 하나.
‘그림자로 의태한 영역을 퍼뜨릴 수 있다.’
그림자 자체가 녀석이 영역이라면 밤마다 세상을 덮을 수 있는 영역을 가지는 것과 같다.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하지만 그림자로 의태한 영역이라면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
메어는 자신의 그림자 중 퀴스피드의 영역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러나 자수정 갑옷의 난반사 때문에 여러 개의 옅은 그림자들이 있었고, 녀석이 올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동해오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했다.
휙-
녀석이 자신 밑에 영역을 만들어서 이동했다. 퀴스피드가 노린 곳은 사각. 곧 빠른 속도로 메어의 등 쪽의 영역을 통해 완전히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메어가 옅은 이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바유는 밤의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공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곧 바유는 퀴스피드를 향해 옅은 이들을 날려보냈고, 메어는 의지색을 감응시켰다. 일렉기타 소리가 나며 퀴스피드에게 가지색 번개가 적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은 것 같았다. 퀴스피드는 연기를 괘뚫으며 멀쩡히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느낌이 이상한데…”
메어는 퀴스피드에게서 떨어지며 옅은 이들을 불러모았다. 조금의 의논이 거쳐 간 뒤, 메어는 작은 옅은 이들을 일자로 늘려, 바늘 모양의 작은 번개들을 퀴스피드를 향해 쏘았다.
이번에도 퀴스피드에게 공격이 적중했다. 허나 마치 철로 된 점액이 자석을 감싸듯, 작은 번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뭔지 알겠어.”
메어가 퀴스피드에게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유와 옅은 이들은 메어의 뒤를 지켰다. 퀴스피드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눈을 초승달 모습으로 떴다.
“겁을 상실함. 어이없음.”
퀴스피드가 곧바로 메어의 주변에 물웅덩이 같은 영역을 좌르륵 펼쳤다. 메어는 곧장 퀴스피드의 영역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서 촉수가 나오자, 메어는 촉수를 힘껏 잡아당겼다.
“이… 이건 예상 밖…”
곧 퀴스피드의 본체가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잠시 뒤, 메어가 잡은 촉수가 있는 쪽을 향해 본체가 끌어당겨지며 올라왔다.
“공격을 흘린 것도, 다 이 영역을 이용한 거구나?”
메어는 퀴스피드를 확실하게 잡은 뒤, 의지색을 방출했다. 퀴스피드는 막을 방도 없이, 엄청난 출력의 가지색 번개에 삼켜졌다. 빛이 차츰 물러가자, 메어의 앞엔 곤죽이 된 퀴스피드가 있었다.
“저쪽은 끝난 것 같네.”
“어머나, 생각보다 제법이네요 저 친구?”
자영과 다예람이 서로 공격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자영은 자수정 손톱을, 다예람은 거대한 나무 숟가락을 현란하게 다루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부하가 당한 것치곤 태연하네.”
“퀴스피드가 당해요? 뭘 모르시네요.”
순간 녹은 아이스크림같이 변한 퀴스피드가 영역을 통해 몸을 감췄다. 메어는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의지색을 준비했다. 그림자로 의태하고 있던 뉴트럴 틴트 빛깔의 웅덩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메어의 앞에 퀴스피드의 영역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요함 속에서 톱밥의 질감을 나타내는듯한 소리만이 들려온다. 쩍쩍 갈라지는 느낌의 건조한 흑색 가루가 날리는 영역은, 퀴스피드의 오징어같은 모양새랑은 이질감이 있었다.
곧이어 색의 영역 그 자체와 동화된 퀴스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가만히 먹혀, 나의 양분이 될 것.”
가루가 번지듯 영역이 메어의 주변을 감쌌다. 그곳에서 전보다 훨씬 긴 가시들이 자라나 주변을 휘감았다.
“어딜 가도 피할 수 없음.”
메어가 다른 곳에 발을 디딜 때마다, 그 주변으로 영역이 움직이며 가시들이 따라붙었다.
“이런…!!!”
메어는 계속해서 자수정 갑옷 쪽으로 공격을 흘리고 막아봤지만, 완전히 방어하지 못하고 가시에 베이기 시작했다. 내구도가 닳은 자수정 갑옷은 금이 가며 차츰 부서졌다. 자영은 애써 무시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메어는 경로를 틀어 천천히 자영에게 합세했다.
“아, 소개하지 않은 친구들이 도착했네요.”
다예람의 말과 함께 양쪽에서 일제히 역겨운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고 있다. 각지에 흩어져있던 암시장 소속의 색채귀들이.
손가락 접는 거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수였다.
갖가지 형태의 냄새가 풍겨온다. 벽지에 퍼져 묵혀진 검은 곰팡내. 버섯이 피어서 굳어버린 오래된 케이크에서 빠져나오는 가스의 부취. 오물이 쌓여 젤리로 굳어버린 의문의 액체들로 채워진 시궁창 내. 자영과 메어는 코를 없애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모두 색의 영역을 가진 색채귀들이었다. 거짓말 같은 크기의 영역이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다예람의 몸 곳곳에 있는 무늬가 떠졌다. 그곳에 박혀있는 눈은 마치 색채귀들과 공명하듯 강하게 축소되었다. 다예람의 눈들이 자영을 향하자 그녀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하하… 전 이 기운을 느낄 때마다 참을 수가 없어요. 이 역겨움. 이 고약함. 이 거북함… 본능을 자극하는 향수예요.”
다예람의 뒤로 퀴스피드가 왔다. 녀석과 다예람의 영역이 합쳐지니 을씨년스러운 폐가가 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불쾌함도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자영과 메어는 어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자영, 도망치자.”
메어는 볼폼없는 제안을 했다. 자영은 메어에게 놀라며 말했다.
“아니야. 이건…”
자영이 머뭇거리자, 메어는 자영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럴 순 없어!”
자영은 메어의 반응에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영은 도망쳐왔어. 하지만, 목적 없는 선택은 없잖아? 도망쳐도 당당할 수 있다는 건 이루고자 하는 게 있다는 거니까.”
자영은 표정을 숨겼다. 메어는 미처 가려지지 못한 자영의 입가를 봤다. 자영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자영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렇지? 나를 처음부터 도울 생각으로 왔다던가…”
“기분 나쁘네.”
자영이 말을 끊었다. 메어가 걸음을 멈추자, 자영은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는 차갑게 침묵하며 의지색을 발하기 시작했다.
땅이 진동할 정도의 통기타 소리가 나며 두텁고 아주 높은 수정벽들이, 빠르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메어는 자영이 있는 쪽으로 뛰려 했지만, 벽이 올라오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골로버 건이 해결된 이젠, 상관없는 일이잖아. 빠져.”
“잠깐… 안 돼… 안 돼!!!”
그 말을 끝으로 자영의 땅은 색채귀들과 함께 고립되었다. 자영의 마지막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메어는 눈을 크게 뜨며 자수정을 쾅쾅 쳐댔다.
“죽으려고 도망치는 녀석이 어딨어!!!”
메어는 슬프게 소리 질렀다.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벽을 계속해서 쳐댔다. 그러나 그녀의 나약한 힘으론 생채기 하나조차 낼 수 없었다.
메어의 뒤에 있던 바유는 그녀를 제지하며 말했다.
“자영의 의지를 존중해라. 어서 도망치자고.”
“이렇게, 이렇게 혼자서 도망쳐도 당당한 거야?”
메어는 고개를 숙인 채 처량히 메아리치는 통기타 소리를 들었다. 메어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자영에게 무슨 존재였는가. 그녀는 정녕 죽기 위해 도망쳤는가?
“이제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자영은 수정벽을 뒤로한 채 천천히 다예람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예람과 퀴스피드는 가만히 자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나는 동료애네요. 자영씨. 정말 다정하신걸요?”
“…”
자영은 침묵하며 고요히 몰려오는 색채귀 군단을 기다렸다. 다만 절망스러운 상황과는 달리 그녀는 두려움 없는 평온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언니.”